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형주 공방전의 단계 === '형주를 빌리는 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사건으로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고, 노숙은 손권에게 남군을 빌려 유비를 주라고 권유하는데 성공해 형남 4군을 나눠 형주를 감독하게 한 사건이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사람을 파견하여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삼군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군사를 보내어 삼군을 함락시켰는데, 당시 조조가 한중을 공격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유비는 익주를 잃을것을 걱정했고, 사신를 보내 손권에게 화합을 구하고, 상수를 그어 형주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후세에는 "형주를 빌린다"는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 배경 적벽대전 후, 손권은 유비와 연맹을 결성하여 승승장구하여, 1년에 걸쳐 조인군을 강릉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조조군은 남양군 및 양양으로 퇴각했고 손유 연합군은 무주공산이 된 형남 공략에 나섰다. 전후 동오대도독 주유는 형주자사부의 치소인 남군의 태수(太守)로, 유표 사후 형주목(荆州牧)을 칭한 유기가 죽은 후 유기의 후견인이던 유비가 형주목이 되었고[* 손권을 거기장군 서주목으로 올려 손권의 양주 지배를 확고히 해주었다.], 주유는 강남의 지역을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비는 장강 남안의 유강구에 진을 치고 공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손권이 유비를 두려워했고 동생인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우호를 다졌다. 2. 땅을 빌리다 후에 유비는 주유가 그에게 준 땅이 적어서, 무리를을 수용하기에 부족하였기에 친히 경구에 가서 손권을 만나, 자신에게 관리를 맡기고 형주를 감독할 것을 청구하였다. 주유는 상서를 올려 반대하고 유비의 가택연금을 건의하였다. 이에 여범도 찬성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으로 손권은 형주를 빌려주지도 않았고 유비를 가택연금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210년) 주유가 병사하고 노숙이 대독을 계승하자 노숙은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준다면, 형남 4군을 다르게 나누어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確認他分得荊南四郡), 유비가 형주를 전권하도록 하는 건 조조를 상대로 적을 세우는 것과 같으니 동오가 조조와 대치하는 동안 조조의 압력도 분산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고 손권을 납득시켰다. 이로써 손유연맹은 공고해졌다.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붓까지 땅에 떨어뜨렸다. (이전에) 주유, 감녕은 손권에게 익주를 공격하라고 권했다.손권이 유비에게 공동 진출을 요청하자 유비는 혼자서 촉을 취하려 하여 종실 유장을 차마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쌍방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3. 형주토벌 건안 20년(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해 유비에게 약조대로 장사, 영릉, 계양 삼군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유비는 "량주를 얻은 뒤에 형주를 꼭 드리겠소"라고 답하였고 손권은 이를 유비가 거짓말로 시간끄는 일이라고 보고 장사, 영릉, 계양 삼군에 장리를 임명했지만 입촉한 유비를 대신해 형주를 관리하던 관우에 의해 추방당했다. 손권이 크게 노하여 여몽이 2만군마를 이끌고 삼군을 탈취하였다. 여몽이 삼군을 공략하자, 유비 역시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나왔고 이윽고 두 군대는 익양에서 대치를 하였다. 형주 문제에 관해 전권을 맡고 있던 노숙과 관우가 회담하고, 회담에서 관우는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선 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까?"라고 반박했다. 노숙은 우리가 성심껏 자본과 땅을 빌려 준 것은, 너희의 병사들이 장판에서 패하고 먼 곳에서 와도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관우를 꾸짖었다. 이제 너희는 익주를 받아서 갚을 생각도 없고 우리는 지금 삼군만 구하고 있는데 돌려줄 생각도 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었다. 아직 노숙이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땅은 인덕이 있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말참견을 하고, 노숙은 악을 쓰며 호통을 치고, 말과 얼굴색이 모두 엄했다. 관우는 칼을 들고 일어나 "이것은 나라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눈짓으로 그에게 떠나라고 했다. 4. 상수의 맹약 그런데 이 무렵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익주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 손권에게 화해를 구했다. 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하고 유비와 쌍방이 화해하고,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였다. 강하, 계양, 장사 이동은 손권, 남군, 영릉, 무릉 이서는 유비에 속한다. 5. 후속 쟁탈 219년 관우가 북쪽 [[판청구|번성]]을 공격했다, 손권의 대도독 여몽이 틈을 타 '백의도강'으로 기습해 남군, 영릉, 무릉 3군을 차지했다. 221년, 유손 쌍방은 [[이릉대전]]를 벌였다. 손권이 다시 이겼고 그 후로 쌍방은 다시 대전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